빈 비행시간 단 2시간 30분. 훌쩍 떠나 마음 가득 채워 돌아올 수 있는 도시가 있다면, 단연 대만 가오슝이다. 타이베이의 번화함과 다른 결을 지닌 이 도시는 한때 세계 3위 물동량을 자랑하던 항구도시였지만, 중공업이 쇠퇴하며 텅 빈 창고만 남았다. 그 침묵의 공간을 다시 채운 건 다름 아닌 예술이었다. 녹슨 컨테이너 위에 그림이 내려앉고, 오래된 창고에 전시장이 들어서면서 가오슝은 대만에서 손꼽히는 예술 도시로 다시 태어났다.

빈 가오슝 여행의 출발점은 단연 보얼예술특구다. 이곳은 가오슝항 제2부두 자리로, 한때 원자재와 완제품이 오가며 번성했던 산업의 심장부였다. 하지만 중공업이 저물면서 창고는 하나둘 비었고, 발길도 뜸해졌다. 다시 사람을 불러 모은 건 젊은 예술가들이었다. 텅 빈 컨테이너에 전시를 열고 낡은 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이 조용한 부두는 연간 400만 명이 찾는 관광지로 탈바꿈했다.


빈 가오슝 최초의 기차역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펑라이 창고 클러스터는 붉은 벽돌 창고 사이를 미니 기차가 오가며 옛 철도의 기억을 되살리는 공간으로, 국제철강예술제 출품작들이 잔디밭 곳곳에 세워져 있어 사진 명소로도 인기가 높다. 다이 창고 클러스터는 사탕공장이었던 이력을 품은 채 작가들의 섬세한 디자인 작품과 레지던시 공간으로 채워져 있다.


빈 눈여겨볼 곳은 1914년 지어진 설탕 저장 창고를 개조한 KW2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공습 피해를 입기도 했던 이 건물은 2003년 역사건축물로 지정된 뒤 복원을 거쳐, 지금은 대만 로컬 수공예품과 전통 음식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 공간으로 거듭났다. 낡은 담벼락과 소박한 창문 너머로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골목마다 다른 표정의 벽화가 이어지니,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걸으며 눈에 담아볼 것을 권한다.



빈 가오슝의 예술적 저력은 항구에만 머물지 않는다. 웨이우잉 국가예술문화센터는 대만이 역점을 두고 지은 국립극장으로, 첫인상부터 압도적이다. 네덜란드 건축가 프랜신 호벤이 반얀나무에서 영감을 얻어 설계한 이 건물은 비가 잦고 무더운 가오슝의 날씨를 고려해 콘서트홀과 오페라하우스 등 여러 공연장을 하나의 부드러운 지붕으로 감싸 안았다. 9,194개의 파이프로 이루어진 파이프오르간은 이곳의 자랑거리다. 건물 바로 앞 횡단보도만 건너면 이탈리아, 벨기에, 미국 등 세계 각국 예술가들이 참여한 웨이우잉 거리예술마을이 펼쳐지는데, 오래된 건물 벽면을 가득 채운 벽화의 완성도가 높아 골목을 도는 재미가 쏠쏠하다.



빈 또 하나 놓치기 아까운 곳은 다동예술문화센터다. 마치 거대한 열기구가 건물 위로 떠오른 듯한 독특한 외관 때문에 보는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상을 남긴다. 원형 구조물 아래로 빛이 쏟아지는 1층 광장은 관람객들의 쉼터이자 사진 명소다. 880석 규모의 공연장과 대형 전시장 외에도, 건축·공연·수공예·사진 등 12가지 주제에 걸쳐 20만 권의 장서를 보유한 대만 최초의 예술 도서관이 자리해 있어, 공연이 없는 날에도 조용히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공간이다.



빈 가오슝에서 가장 뜻밖의 반전을 선사하는 곳은 불타기념관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여덟 개의 탑과 108m 높이의 거대한 불광대불이 눈앞에 펼쳐지며 절로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 그중 육도탑에는 불타기념관과 불광사를 세운 성운대사의 발자취가 담겨 있어, 종교시설로서의 무게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빈 하지만 이곳이 특별한 이유는 따로 있다. 엄숙할 것만 같은 불교 사찰이지만, 실제로는 결혼식이나 돌잔치가 열리기도 하고 축제 기간에는 형형색색의 불꽃놀이가 밤하늘을 수놓기도 한다. 손님맞이 건물인 예경대청 1층에는 스타벅스가 자리해 있고, 부처의 일생을 4D로 감상할 수 있는 극장까지 갖추고 있다. 종교와 일상, 전통과 현대가 자연스럽게 뒤섞인 이 풍경은 불교시설에 대한 고정관념을 유쾌하게 깨준다.
빈 낮 동안 예술로 가득 채운 일정을 보냈다면, 저녁은 ‘사랑의 강’이라는 뜻을 지닌 아이허 운하로 향한다. 12km에 걸쳐 이어지는 공원과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무더운 한낮의 열기가 은은한 조명과 함께 서서히 가라앉는다. 유람선에 올라 잔잔히 출렁이는 물결을 바라보며 야경을 즐기는 것도 가오슝 여름밤을 만끽하는 방법 중 하나다.

빈 산책으로 허기가 졌다면 대만 3대 야시장으로 꼽히는 리우허 야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된다. 도로 양옆으로 해산물, 스테이크, 열대과일까지 다채로운 먹거리가 늘어서 있어, 골목을 걷는 것만으로도 여름밤의 활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빈 즉석에서 구워내는 굴전과 새우롤은 리우허 야시장을 대표하는 메뉴로, 고소한 향이 골목 초입부터 발걸음을 붙잡는다. 두꺼운 철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스테이크는 대만식으로 소스와 후추를 듬뿍 얹어 내는 것이 특징이며, 저렴한 가격에 즐기는 별미로 유명하다. 여름 야시장답게 파파야, 망고 등 열대과일을 얼음과 함께 갈아주는 생과일 주스도 더위를 식히기에 제격이다. 매콤한 향이 매력적인 대만식 소시지와 취두부도 빼놓을 수 없는 야시장 별미로, 특유의 강한 향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지만 한 번쯤 도전해볼 만하다.
빈 길거리 음식으로 든든히 배를 채운 뒤에는 걸어서 멀지 않은 메이리다오 역에 들러보자. 이탈리아 유리공예가 나르치수스 쿠아글리아타가 설계한 ‘빛의 돔’이 천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밤에 조명이 켜지면 역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예술작품처럼 빛난다. 낮에는 벽화와 미술관을, 밤에는 강변 산책과 야시장을 즐기는 것. 예술과 낭만이 하루 안에 촘촘히 엮이는 이 흐름이야말로, 가오슝을 휴가지로 추천하는 이유다.
여행작가 채지형 travelguru@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