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PPY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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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바다를 따라, 울진 겨울 여행

채지형(여행 작가)

투명한 바다가 그리워지는 겨울이다. 이 계절에 마음이 먼저 떠나는 여행지는 여럿이지만, 가장 먼저 이름이 불려온 곳은 울진이다. 울진을 떠올리면, 가슴 속부터 시원해진다. 맑은 공기와 깨끗한 자연이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곳. 울진의 해안선은 무려 111.75km에 달한다. 동해를 끼고 있는 10개 지자체 가운데 포항에 이어 두 번째로 길다. 남쪽의 후포항과 북쪽의 죽변항을 양 끝으로, 생명력 넘치는 항구와 고운 모래가 펼쳐진 아기자기한 해수욕장들이 박혀 있다. 바다는 길고, 풍경은 깊다.

[그림 1] 울진의 일출

따스함으로 채워진 후포항 벽화마을

여행의 시작은 후포항이다. 청량한 바다 내음이 숨결처럼 달려든다. 죽변항과 함께 울진을 대표하는 이 항구는 동해안에서도 손꼽히게 큰 포구다. 대게와 홍게, 오징어와 가자미를 실은 고깃배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바다의 하루를 부지런히 옮긴다.

[그림 2] 후포항

분주한 항구를 뒤로하고 마을 안으로 발길을 돌린다. 담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벽에는 큼지막한 대게 그림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정겨운 동네 주민들의 얼굴도 벽화를 장식하고 있다. 알고 보니 TV 예능 프로그램 〈백년손님〉 ‘후포리 장모님’ 편에 등장했던 남서방과 장모, 그리고 동네 어르신들의 모습이다. 깨끗한 공기 위에 파스텔 톤 그림과 활짝 웃는 표정이 겹쳐지니,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림 3] 후포항 벽화마을

벽화마을은 등기산공원으로 이어진다. 해발 64m의 등기산은 야트막한 언덕으로, 동해바다 위에 반짝이는 윤슬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걷기 좋다. 큼지막한 팽나무 한 그루도 풍경에 운치를 더한다. 바다를 향해 놓인 벤치에 앉으니, 울진이 고향인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등기산공원에도 꼭 가봐. 울진 사람치고 거기서 데이트 한 번 안 해 본 사람 없을 거야.” 이런 풍경 앞에 서 있으면, 옆에 앉은 사람의 마음과 내 마음도 자연스레 이어질 것만 같다.

[그림 4] 후포 등기산 공원

등기산공원은 출렁다리를 건너 스카이워크로 이어진다. 멀리서 보아도 아찔하다. 바다 위 20m 상공에 당당히 서 있는 길. 전체 길이는 135m, 이 가운데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강화유리 구간만 57m에 달한다. 발아래 펼쳐지는 푸른 깊이 위로 긴장과 설렘이 동시에 흐른다.

[그림 5] 등기산 스카이워크

까치와 함께 추억 속으로, 이현세만화거리

후포항에서 바다를 따라 북쪽으로 오르다 보면, 동해안 최고의 명승지로 꼽히는 ‘관동팔경’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자리한 유적 월송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신라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이었고, 고려 시대에는 적의 침입을 살피던 망루였던 자리다. 소나무 1만 5000그루가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있어, 풍경은 더욱 깊고 단정하다.

[그림 6] 월송정

월송정에서 죽변항을 향해 다시 오르다 보면, 바닷가를 벗어나 내륙으로 살짝 들어서는 길이 나온다. 까치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까치는 1980년대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의 주인공. 오산항 부근 매화마을에는 이현세 작가의 작품들이 마을 전체를 수놓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까치와 엄지가 먼저 정겹게 인사를 건넨다. 〈공포의 외인구단〉, 〈아마게돈〉, 〈떠돌이 까치〉, 〈남벌〉 등 수십 컷의 장면들이 골목과 담장을 휘감고 있어, 잊고 지내던 추억이 방울방울 피어난다. 마을 전체가 거대한 만화책 한 권처럼 느껴진다.

[그림 7] 매화마을 (1)

[그림 8] 매화마을 (2)

명장면만 모아둔 것이 아니라, 한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벽에 옮겨 그려놓은 구간도 있다. 걷다 보면 어느새 만화 한 편을 완독하게 되는 특별한 경험이다. ‘잘 노는 사람이 문화를 만든다’, ‘호기심이 없다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같은 문장들이 곳곳에 적혀 있어, 발길과 함께 마음도 잠시 멈춘다. 전국에 벽화마을이 여럿 있지만, 이곳만큼 뚜렷한 개성을 가진 곳은 쉽게 만나기 어렵다.

바다를 친구 삼아 달리는 드라이브

매화마을에서 오산항으로 나와 해안 드라이브에 나선다. 오산항에서 망양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약 10km의 도로는 바다와 거의 맞닿아 달리는 매력적인 길이다. 917번 지방도로를 따라 달리는 동안, 오른쪽에는 푸른 바다, 왼쪽에는 정겨운 마을이 나란히 이어진다.

[그림 9] 바다와 친구하며 달리는 드라이브

도로와 해수면의 높이 차가 거의 없어, 바다가 마치 친구처럼 느껴진다. 바다와 나 사이를 가로막는 펜스도, 높은 담도 없다. 넘실대는 파도와 속삭이듯 나란히 달리고 싶은 길이다.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도 보이고, 바다를 마주한 채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눈에 띈다. 문득, 울진 사람들이 조금 부러워진다. 속상한 일이 생기면, 이 길 위로 달려와 마음을 전부 씻어낼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강과 바다를 한눈에, 왕피천케이블카

바다를 따라 오르던 길을 잠시 멈추고, 엑스포공원으로 향한다. 왕피천케이블카를 타기 위해서다. 케이블카는 ‘깨끗한 계곡’으로 이름난 왕피천을 가로지른다. 엑스포정류장에서 해맞이정류장까지 왕복 1430m, 강과 바다를 한 번에 담아 올릴 수 있는 특별한 이동이다.

[그림 10] 왕피천케이블카(1)

케이블카는 일반 캐빈과 바닥 아래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크리스탈 캐빈으로 나뉜다. 일반 캐빈에서도 바다로 가득 찬 풍경은 충분히 아름답지만, 크리스탈 캐빈에 오르면 360도 투명한 유리 바깥으로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계곡에서 흘러내린 왕피천이 바다로 스며드는 장면이 한눈에 펼쳐진다.

[그림 11] 왕피천케이블카(2)

감탄사를 연신 흘리며 6분 남짓 두둥실 떠 있다 보면, 해맞이정류장에 닿는다. 여기서 또 하나의 산책이 시작된다. 먼저 숲길 사이로 5분가량 걸어가면, 숙종이 ‘관동제일루’라는 현판을 내린 망양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망양정 역시 월송정과 함께 관동팔경에 속한다. 원래는 15km 떨어진 기성면 망양리에 있었으나, 1858년 울진 현령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정자에 올라 동해를 내려다보면, 나도 모르게 ‘아’ 하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속이 맑게 비워지고, 시간이 잠시 멈춘 듯한 기분이 된다.

[그림 12] 망양정과 동해바다 (2)

[그림 13] 망양정과 동해바다 (1)

바다가 궁금하다면, 국립해양과학관

지구 표면의 70%를 차지하는 바다. 여행의 마지막 코스는 그 바다에 던진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꾸어 주는 국립해양과학관이다. ‘바다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바다는 지구를 하나로 연결한다. One ocean, one planet.’이라는 슬로건 아래, 해양과학기술과 바다의 다양한 얼굴을 담은 전시들이 차례로 이어진다.

[그림 14] 국립해양과학관 (1)

[그림 15] 국립해양과학관 (2)

그중에서도 마음에 오래 남은 것은 해양 쓰레기에 대한 전시였다. 바다에 버려지는 쓰레기의 양은 연간 17만 7000톤. 담배꽁초와 페트병, 비닐봉지와 빨대까지, 우리가 너무 쉽게 버려온 물건들이 바다를 대신 떠안고 있다. 전시를 나와 바다를 다시 바라보니, 풍경이 달리 보인다. 이 아름다움이 오래 이어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작고 사소한 습관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천천히 발길을 돌린다.

[그림 16] 국립해양과학관 (3)